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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학농민군의 봉기

가. 개요

  1894년 서부경남 지역의 농민들은 전에 없던 심한 가뭄을 만나 곤경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이 1월부터 함안· 사천 등지에서는 농민들의 항쟁이 전개되고 있었고, 7·8월에 가서는 경상도 전체에 걸쳐 민란이 속출하면서 이 지역은 각 고을에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동안 진주 덕산 등지를 중심으로 내밀한 활동을 전개해 왔던 서부경남 지역의 동학조직은 이처럼 고조된 농민층의 분위기와 호남 지역에서 실질적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는 호남 동학농민군의 지원에 힘입어, 사회전면에 나서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6월말에 있었던 일본의 불법적인 궁성점령과 청일전쟁 개시는 평소부터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에게 심한 위구심을 불어넣게 되었다. 이전부터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왜양(斥倭洋)을 내세웠던 동학조직이 그러한 기치를 전면에 내걸고 제2차 봉기를 일으키면서 이 지역의 동학농민군도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호남·호서에서의 본격적인 봉기가 있기 이전인 9월 초에 이미 서부경남 지역에서는 호남지역 동학농민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동학군 봉기가 시작되었다. 9월 1일 하동 공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진주를 중심으로 동학도들의 대집회가 시작되면서 경남 서북부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서부경남 지역의 대부분은 동학군에 의해 장악되어 갔다. 17, 18일 진주 대집회 이후 각 지역의 동학군들은 다시 곳곳으로 흩어져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9월말 이후 감영과 통영에서 파견한 관군과 일본군의 본격적인 토벌 활동이 시작되면서 동학군의 활동은 점차 위축되기 시작한다. 특히 9월 말경의 일본군의 하동공격과 10월 중순경의 곤양 금오산(金鰲山 : 현 하동군 진교면) 전투, 진주 고승당산(高僧堂山 : 현 하동군 옥종면) 전투에서 동학군은 큰 타격을 입고 점차 기세가 사그러져 갔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곳곳에 출몰하면서 10월 말까지는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갑오년 9월에 봉기했던 동학운동은 농민을 주체로 하는 반봉건적인 민중봉기였지만, 그 배경은 동학의 근대적인 사상과 종교적인 조직체계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동학을 거론치 않을 수 없으니, 여기에서는 먼저 동학의 창도와 박해, 신원운동 등을 살펴 보고 다음으로 동학조직의 확산과 9월의 봉기순으로 기술코자 한다. 그리고 본고는 《경상사학》 제7·8합즙(1992. 10)에 수록된 김준형 교수의 논문 <서부 경남지역의 동학군 봉기와 지배층의 대응> 을 토대로 하였고, 또 《진주시사》 (1994년) 상권에 수록된 관련 기사를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

나. 동학의 창도(創道)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는 경주 현곡면(見谷面 : 현 월성군) 가정리(柯亭里) 옛집에서 수련을 계속하다 37세 때인 1860년(철종 11) 4월에 비로소 각도(覺道)하니 무극대도(無極大道)의 동학이 이에서 비롯되었다.
  동학은 경주지방의 화랑도(花郞道)와 그 연원을 같이 한다는 주장도 있다. 유(儒)·불(佛)·선(仙) 3교의 합일은 곧 천도(天道)의 한 부분이라는 데서 사상적 체계를 최치원(崔致遠)과도 비교하지만 경상도 지역의 보수적이고 전통성이 강한 특성에서 신흥 종교의 창시를 가져왔다고 보겠다.
  동학은 개화기의 사조에 휘말려 급격한 정신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우리것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서학(西學)· 서교(西敎)에 대항한다는 신흥종교로서 동학(東學)이라 이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 지주를 잃은 몰락양반의 후예들에게 영합되었고, 한편으로는 빈궁과 질역(疾疫)에 허덕이던 평민층에 의해 널리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다. 최제우는 전통 유교가문에서 출생하여 불교와 천주교에도 접근해 보았지만 만족하지 못해 구도(求道)의 행각 끝에 경남 울산의 천성산(千聖山) 적멸굴(寂滅窟)에서 수행하다 마침내 고향인 경주에서 전라도로 내려가 남원의 은적암(隱跡庵)에서 은거하다가 도수가(道修歌)·논학문(論學文)·권학가(勸學歌)를 지었다. 이때 무주와 남원에서 여러 사람에게 도(道)를 전수하였고, 1862년에는 다시 경상도로 와 아산성(亞山星) 박대문(朴大汶)의 집에서 지내면서 수덕문(修德文), 복중가(覆中歌)를 지었다.
  모든 종교가 최고의 신을 상계(上界)에 두고 하계(下界)에 있는 인류를 그 지배하에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반하여 동학은 입도(入道)하여 지기(至氣)에 접하면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 천인(天人), 합일을 설파한 것이다. 여하튼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이르러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事人如天)’하였으며 또 후일에는 ‘사람은 즉 하늘이다(人乃天)’하였으니 여기에는 인종의 구별이나 반상(班常)의 계급이나 적서(嫡庶)의 차별, 남녀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는 인권의 평등사상인 것이다.
  이렇게 민중속에 파고들며 포교한지 몇 해만에 신도수가 3천을 넘었고 경남지역에서도 울산의 서군효(徐君孝), 고성의 성한서(成漢瑞) 등이 접주(接主)가 되어 그 교세를 확장하여 교단조직을 이루고 날로 번성해 가자 정부는 동학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키는 사교(邪敎)로 보고 탄압하였다.
  1863년(철종 14) 드디어 최제우는 20여인의 교도들과 함께 체포되어 다음해(고종 1) 3월 10일, 대구 장대(將台)에서 최후를 마치니 향년 41세였다. 그러나 이미 민중속에 뿌리박은 동학은 쇠퇴하지 않고 곧 2세 교주 최시형은 동요와 불안속에 헤매는 민중속으로 교세를 확장해 충청·전라·경상의 하3도를 중심으로 강원·경기도까지 퍼져 갔다. 특히 경남과 전남의 지리산 남쪽 지방에서도 반상을 가리지 않고 모두 동학에 가입하였다.
  이렇게 교세가 확대됨에 따라 각처에 접소(接所)가 설립되고 접주가 있어 그 포관(包管)지역에 따라 대접주(大接主)·도접주(都接主)·수접주(首接主) 등을 두고 교구제와 같은 포(包) 제도를 실시하여 대접제와 같은 포(包) 제도를 실시하여 대접주가 포주로서 예하 접주의 통솔을 하였다. 포에는 육임제(六任制)를 시행하여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의 임무를 분담시키고 교단을 통할하는 중심기관으로 법소(法所 : 충주)를 두었다.

다. 동학의 신원운동

  교세가 점점 떨쳐감에 따라 대구장대에서 처형을 당한 교조의 억울한 죄안(罪案)을 해원(解潽)하려는 교도들의 신원운동(伸潽運動)이 일기 시작했다.
  문경사람 이필제(李弼濟)가 최시형 교주에게 선사(先師 : 崔水雲)의 신원운동을 벌일 것을 제의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1871년(고종 8) 3월 10일 교조의 수형일을 기하여 영해·영덕·상주·문경 등지의 교도 5백여 명을 동원, 영해현으로 난입하여 수령 이돈(李燉)을 살해하고 영양 일월산으로 도망하였다가 그 해 8월 문경에서 재거하려다 관군에 잡혀 처형되고 말았다.
  그 후 교세의 확장에 따라 관헌의 탄압은 갈수록 우심하여 심지어는 재산과 인명의 피해를 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그 가운데서도 심한 곳은 호서(湖西)의 영동, 옥천, 청산, 호남(湖南)의 무장, 고창, 정읍, 금구, 만경, 여산 등지였다.
  1892년(고종 29) 10월, 서인주(徐仁周), 서병학(徐丙鶴) 등이 교주에 선사의 신원운동을 주장하여 마침내 공주에 교도들을 소집하고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에게 교조신원과 교도탄압을 금지하라는 탄원서를 보냈고, 11월 1일에는 전국의 수천명의 교도들이 삼례(參禮)에 집회하여 수운선사(水雲禪師)의 신원, 탐관오리의 제거, 교당설치 등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전라감사 이경식(李耕植)에 보내고 여러날 동안 시위를 벌렸다. 이때 정부에서는 김문현(金文鉉)을 내려보내 이들 1천여 명을 효유(曉諭)하여 해산시키고 또 금구(金溝)에 모인 1만여 명도 효유하여 해산시켰다. 또 1893년(고종 30) 정월에는 전국의 교도들이 보은(報恩) 장내(帳內)에 모여 왕에게 직접 상소키로 하였다. 그리하여 2월 8일 박광호(朴光浩)를 대표로 하는 교인 박석규(朴錫圭) 김낙철(金洛喆) 등 40여 명이 과유(科儒 : 과거보러가는 선비)로 가장하고 상경하여 11일 광화문 앞에 엎드리어 탄원의 글을 올리고 3일동안이나 계속했다. 이 복합상소(伏閤上疏 : 궐문앞에 엎드려 상소하는 것)에 대하여 ‘너희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면 마땅히 원대로 시행하리라’는 왕의 유시가 내려 교인들은 해산했다.
  그러나 이런 조정의 약속도 실행되지 못하고 갈수록 박해는 심해갔다. 지방의 감사나 조정에까지 탄원을 했으나 성과가 없이 3월 10일(1893) 최수운 교조의 수형일을 기하여 전국의 교도를 보은군의 외속리면 장내리에 소집하니 수만명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매일 수 3백명씩 연락부절하며 산 아래 평지에 장광(長廣) 1백여 보(步)에 높이 반장(半丈)이나 되는 석성(石城)을 쌓고 척양척왜(斥洋斥倭)의 큰 기와 5색기를 5방에 세우고 각 지방의 포(包)마다 기를 세웠는데 그 인원이 2만여 명이라 하였다. 그리고 3월 10일 보은군수에 보내는 집회통문과 충청감사에 보내는 방문(榜文)이 모두 교조신원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척양척왜를 맹렬히 주장하고 있었으니 보은집회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어윤중(魚允中)을 선무사(宣撫使)로 파견하여 이들을 설득하도록 하였다.
  3월 29일 어윤중은 청주영장(淸州營將) 백남석(白南奭), 보은군수 이중익(李重益), 순영군관(巡營軍官) 이주덕(李周德)을 대동하고 보은에 도착, 다음 4월 1일 장내에 이르러 관대한 왕의 조칙을 전달하고 해산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청주 영병 1백여 명을 보은으로 출동케 하니 세부득히 장내에 모인 교인들은 3일내로 해산키로 약속하고 4월 2일 밤까지 모두 해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동학운동이 종식된 것이 아니라 이후의 민란과 합류되는 역사의 연속 위에 있었다.

라. 동학조직의 확산

  서부경남 지역에서의 동학도들의 활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1893년 열린 보은집회에 하동· 진주접 소속의 동학도도 수십여 명이 참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갑오년에 들어오기 이전에 곳곳에 동학조직이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1894년 봄 호남에서 동학군이 본격적으로 들고 일어났을 때 영남· 호서지방에서도‘협잡지류(挾雜之類) 취당 행패(聚黨行悖)’라 해서 동학도들의 활동이 표면화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영남지역에서는 동학도가 호남에서 모였다느니, 지례(知禮), 삼봉(三峰) 밑에 둔결했다느니 하는 소문과 더불어 진주 덕산(德山)이 동학도들의 소굴이라는 소문이 나돌아 감영과 각읍 관아에서 이에 대한 대응에 부심하게 된다.
  소문대로 덕산 일대는 서부 경남지역 동학도들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백낙도(白樂道, 혹은 道弘)를 정점으로 하고 손웅구(孫雄狗)·고만준(高萬俊)·임정룡(林正龍)·임말룡(林末龍) 등이 핵심으로서 보은집회 이후 공개적인 활동을 보이고 있었다. 덕산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리산 기슭의 삼장(三壯)·시천(矢川)·사월(沙月)·청암면(靑巖面) 등도 동학도들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주목되고 있었음은 당시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82)
  덕산은 1862년(철종 13) 2월, 진주 농민항쟁 때 첫 봉기지의 역할을 했고, 1870년(고종 7) 이필제(李弼濟)가 진주작변(晋州作變)을 계획할 때도 중요한 거점으로 주목되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럴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겠지만, 백낙도 세력도 조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권력을 장악하려는 변란의 계획을 세웠던 무리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관의 동학도에 대한 추포활동이 본격화되는 4월 중순에 덕산의 백낙도를 위시한 핵심 세력은 영장 박희방(朴熙房)의 도포활동에 의해 거의 처형당하거나 수감되면서 위축된다. 일시적으로 백낙도의 처형을 항의하는 많은 동학도들의 소요가 진주에서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것도 곧 진정되어 버린 듯하다. 그 이후 동학도들의 활동은 좀 위축되어 있었던 것 같지만, 그러나 6월말 이후 호남 동학군들이 소백산맥을 넘어 경남 서북부 지역으로 들어오면서 다시 서부경남 지역 동학도들의 활동은 활발해진다. 6월 26일경 남원의 동학군이 운봉(雲峰)을 거쳐 함양을 공략하고 이어 안의에 들어왔다. 당시 이곳 현감으로 있던 조원식(趙元植)은 동학군을 맞아들여 연회를 베풀다가 이들을 기습하여 섬멸했다. 많은 사상자를 낸 동학군의 잔여 세력이 함양 산곡으로 피해 달아난 후 조원식은 인근 함양과 연대해 육십령(六十嶺)·팔양치(八良峙)를 거점으로 하는 자체적인 방위체제를 갖추었다.
  호남 동학군은 안의공격 이후 경남으로 진입하기 위해 그 길목인 운봉에 대한 몇 차례의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남으로써 경남 서북부 지역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안의 공략 때 호남에서 넘어온 동학군은 안의에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다른 읍에도 흩어져 들어가 활동을 하면서 서부경남 지역의 동학도들의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것 같다. 단성현(丹城縣) 단계리를 비롯한 인근 마을에 7월 15일 동학군들이 출현한 이후 이 부근에서 동학군들이 출몰· 횡행하고 있었음을 통해 그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은 하동의 동학도들의 활동과 관련되는 다음의 자료이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호남과 연결되어 있는 하동은 강해(江海)의 잇점 때문에 남방의 일 도회(都會)가 되고 있어서 간민(姦民)과 흉악한 도적이 들끓었다. 특히 지리산 기슭의 화개동(花開洞)은 계곡이 깊고 험해서 화적(火賊)들이 영· 호간을 오가며 출몰하고 있었고, 이를 잡기 위해 관의 포졸들이 들락거리면서 많은 폐를 낳고 있었다. 이에 대응해 화개동에서는 자체의 자위조직인 민포(民砲)가 조직되어 있었다. 그런데 광양(光陽) 동학조직의 지원으로 하동읍내에도 도소(都所)가 만들어져 공개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이채연(李采淵)이 하동으로 부임해 와서 이 민포를 끌어들여 동학도를 몰아냈다.83)

  이채연의 동학도를 방축한 것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도 확실치 않다. 그의 하동부임이 6월 29일로 되어 있어, 아마 7월 초 이후에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광양 동학조직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하동의 동학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전년의 보은집회에 하동접도 참여했던 것으로 보아, 내밀한 조직활동은 이루어지고 있었고 도소 설치 등 공개적인 활동은 광양 동학도와의 긴밀한 유대와 지원 속에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호남 동학의 지원에 힘입어 7월 이후 점차 동학도의 공개적인 활동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7,8월 영남지역에서 민란이 속출하면서 농민들의 고조된 분위기와 관의 무기력화는 서부경남 지역에서의 동학조직의 영향력과 위세를 발휘해 갈 수 있는 여건이 되고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7월 말에서 9월 초에 걸쳐 두 명의 동학도가 경남지역 각읍을 순행하다 붙잡힌 사건이다. 즉 하동에 거주하는 최학봉(崔鶴鳳)과 김병두(金炳斗)는, 동학도로서 호남 동학군의 두령 전봉준(全琫準)의 지시에 따라 각읍을 순행하면서 각 고을의 행정 상황을 탐문하고 있다고 칭하면서, 각 고을의 수령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들이 다녀간 읍과 관서를 보면, 7월 29일 창원을 비롯하여 9월 3일 좌병영에 이르기까지 11개 고을이나 되었다. 그들은 마지막 순행지인 울산 좌병영에서 동래에서 파견한 교졸(校卒)들에게 체포되었다. 부산항 감리서(監理署)에서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들은 진짜 동학도가 아니라고 변명하였고 결국 일본 영사관에서도 가짜로 단정하였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들은 진짜 동학도였던 것 같다. 그들은 수령들을 만나 목민관으로서의 잘못된 행적을 당당하게 질책을 하였고 또 그 관아를 떠날 때 일부 노자(路資)와 마필(馬匹)을 제공받았다.84)
  이러한 사실은 경남지역에서도 이미 동학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화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 무렵 고성부사로 있다가 체임되어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었던 오횡묵은 8월 16일에 다시 다른 동학도 2명을 만났는데, 그들도 각 고을의 상황을 탐문하러 왔다고 했다. 그 중 금구(金溝)에 사는 동학도라고 하는 한헌교(韓憲敎)가 경상우도, 특히 상주·선산·성주·고령·의령·함안·사천·단성·진주 등지에 가득 차있는 것이 동학도들이기 때문에 이곳을 피해 연해읍을 따라 대구로 올라가야 한다고 권하고 있다.85) 그만큼 동학도들이 서부경남 곳곳에 세력을 뻗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82)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慶尙右道東學黨擾亂의 景況과 이에 대한 의견> pp. 170∼171
83) 《梧下記聞》 第2筆 7월 6일 이후의 부분


마. 9월 동학군의 봉기

  1893년 삼례집회, 복합상소, 보은취회, 금구취회로 이어지는 동학교도들의 집회와 1894년의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이러한 상황하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왜양(斥倭洋)이라는 구호를 통해 민란주체의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발현되지 못했던 반외세의 이념을 표면화시켜 주었다. 물론 제2차 농민봉기에서 내건 슬로건도 보국안민이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가 전면에 등장하였다. 일본군과 이에 결탁한 개화파 정권에 대한 명백한 적대감을 보이고 이들을 격퇴할 것을 외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적인 문제제기가 제2차 농민군 봉기를 전국적인 봉기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즉 집강소(執綱所)시기까지는 농민군의 봉기가 주로 전라도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면, 제2차 농민전쟁에서는 전라도의 범위를 벗어나 전국으로 봉기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일본군의 왕궁점령 소식이 전해진 후 집강소 설치지역은 충청도· 경상도지방으로 확대되었으며, 제2차 농민전쟁의 시발인 전주기포(全州起包)에 집결한 농민군은 전라도 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농민들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는 동학군 진압을 위해 4월 30일, 청국에 지원을 요청함으로써 5월 2일과 5일에 청군이 아산(牙山)에 상륙하였고, 5월 6일에는 불청객 일본군도 천진조약(1885)을 구실로하여 인천(仁川)에 상륙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일본공사에게 이를 항의함과 동시에 철군을 요구하였으나 이들은 이를 거부하고 5월 9일과 12일에도 계속 파견하더니 급기야는 내정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들은 소위 <내정개혁방안요령>이라는 5개 조목을 제시했는데, 이에 조정에서는 개혁은 스스로 진행할 것임을 통고하고 일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궁성을 포위하고 고종을 협박하더니 6월에는 끝내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케 하였다.
  한편, 호남에서 전개되던 동학농민군과 관군간의 싸움은 5월 7일 전주화약이 체결됨으로써 진정되어 갔지만, 이후 전라도 53개 군현에서는 집강소가 설치되어 농민군이 각읍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6월 21일 일본군의 궁성 점령의 소식이 민간에 전해지면서 앞에서 언급했듯이 분위기는 달라진다. 한동안 관망하고 있던 호남의 동학농민군의 지도부는 전국봉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돌리고, 9월 중순경 전봉준은 전주, 손화중(孫華仲)은 광주에서 기포하였다. 9월 18일(양 10. 26) 삼례역에는 10만여 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였다.
  이에 앞서서 경상도 지역에서는 이미 8월말부터 동학농민군의 읍내점거 및 무기탈취 등의 본격적인 활동이 전개된다. 8월 28,29일 이미 외곽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예천(醴泉) 농민군과 읍을 거점으로 한 보수집강소 간의 전투가 벌어지고 그것은 보수세력 승리로 귀결된다. 이에 앞서 8월 26일에는 용궁(龍宮) 동도 수천명이 읍중에 돌입하여 무기를 약탈하는 등 경북지역에서는 이미 8월 말부터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서부경남 지역에서도 9월 1일부터 호남 동학군과의 연대하에 본격적인 동학군 봉기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9월 1일 광양으로 쫓겨갔던 하동지역 동도(東徒)가 광양· 순천포의 동도와 함께 섬진강을 건너 하동을 공격해 왔다. 부사는 피신해 버린 상태에서 하동의 민포가 주축이 되어 통영으로부터 대완포(大碗砲)를 가져와 강안에 설치하고 관아의 뒷산 안봉(鞍峰)에서 진을 치고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 섬진강 건너편의 동학군은 두 길로 나누어, 한 갈래는 섬진에서 강을 건너 부북(府北)으로, 다른 한 갈래는 광양 남쪽 망덕진(望德津)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부남(府南)으로 진출했다. 1,2일 전투에서 읍내를 점령한 동학군은 읍내에 도소(都所)를 설치하여 읍을 장악하였으며, 외곽의 각 촌락으로 들어가 약탈을 행하고 특히 민포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화개동(花開洞)에 대대적인 보복 약탈과 방화를 행하였다. 그 이후 5,6일을 더 머물고 있던 동학군 중 일부는 호남지역으로 되돌아 가고 나머지는 총대장 김인배(金仁培)를 따라 진주로 향했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진주 등지에서도 동학군 봉기의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미 9월 1일부터 진주· 단성 등에서 동학도들의 취회가 시작되고 있었고, 이 집회에서 동학도들은 <진주초차괘방(晋州初次掛榜)>을 내걸어, 8일 각리(면)마다 13명씩 평거 광탄진(廣灘津)에 일제히 모일 것을 요구했다. 불참면에 대해서는 의당조치한다는 것, 3일의 식량을 가지고 올 것 등의 내용으로 담겨 있었다.86) 이후 약속한 8일, 진주 73개면의 주민들이 각면마다 100명씩 죽창을 들고 일제히 읍내 시장가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충경(忠慶)대도소의 10일자 통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 때 진주읍내에 충경대도소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각리에 재차사통(再次私通)을 발하여 각 이동의 이임· 동장들은 자기 지역의 민폐를 교정할 것과 대동(大洞) 50, 중동(中洞) 30, 소동(小洞) 20명씩 9월 11일 오전 부흥대우치(復興大牛峙)로 모일 것, 불응하는 이임· 동장 집은 탕진할 것이라는 통고를 하였다. 이와 동시에 충경대도소에서는 <경우(慶右)의 각읍 읍촌에 사는 대소민들에게>라는 제목에 <동학도괘방(東學徒掛榜)>을 내걸어, 왜적의 침입을 징벌하고자 진주에서 대회를 가졌다는 것과, 동학도에 호의적인 지금의 병사 민준호(閔俊鎬)가 갈리고 왜와의 조약에 따라 새로운 병사가 부임할 것이니 이를 막을 것, 그리고 사사로이 토색하는 자는 대도소로 신고할 것을 널리 알렸다.87)
  이 무렵 사천(泗川)에서도 9월 13일, 동학도 수십명이 조사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호장(戶長)과 이방(吏房)을 끌고 갔으며, 그 무리 수백명이 방포(放砲)를 하며 남문으로부터 동헌에 침입하여 본관이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군기고를 부수고 군수물을 약탈해갔으므로 본관이 여러 가지로 달래어서 군수물을 돌려받았는데 그 무리들이 돈을 찾아내고 전표(錢票)를 빼앗아갔다. 17일, 접소로부터 스스로 사천의 현감은 영남과 호남에 알려진 선한 관리라 하며 전표종이를 반환하였다. 18일에는 호남 동학도 100여 명이 또 돌입하여 작청(作廳)에 유숙하고, 19일 남해로 방향을 바꾸어 돌아가더니 점차로 흩어져 갔다. 20일에도 각 처에 있는 동학도 800여 명이 각각 총검을 들고 읍저(邑邸)에 난입하여 관속들을 위협하고 하리 황종우(黃鍾羽), 황태연(黃台淵)의 집을 불지르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우마· 의복 등의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리고는 22일 고성으로 떠났다고 한다.88)
  고성에서는 마침 수령이 비어 있던 때였는데, 동도 600여 명이 읍내로 진입하여 포량미(砲糧米)를 임의로 빼내 인근 마을에 나누어 주고 취반(炊飯)하게 한다든지, 부랑란류(浮浪亂類)들을 동학도로 끌어들이고 부민들을 붙잡아와 토색을 하면서 읍저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경상도고성부총쇄록》 갑오 11월 26일자 기록에 의하면, 16일에도 동학군 천여 명이 읍내에 들어왔던 것 같다. 곤양에서는 9월 15일 하동 동도 수천명이 다솔사(多率寺)에서 취회하였고, 광양·순천 동도 수천명이 곤양 읍성으로 들어왔다가 조총 20자루를 탈취하고 ‘연기취각’(連旗吹角) 하면서 진주로 향했다. 이 두 집단은 진주와의 접경에 있는 완사역(浣紗驛) 부근에서 합류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9월 17일에는 동도 수천명이 하동으로부터 진주로 들어와서 각 공해에 접소를 설치하였고 이어서 18일에는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 김인배(金仁培)가 천여 명을 이끌고 입성하였다. 이 때 동학군은 몇 개의 부대로 나뉘어 인솔되고 있었고 각 지역의 포(包) 단위로 배치되고 있었다. 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다른 지역의 동학군들이 진주에 도착했을 때 병사와 목사는 성밖으로 나와 이들을 달랬으나 소용이 없었는데,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여러번 동학군들을 효유해서, 그들은 며칠간의 대회를 마친 후 19일 퇴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소촌역(召村驛)으로 가서 타격을 가하고, 22일에는 대여촌리(代如村里)의 용심동을 습격하여 이 마을의 30여 가호가 연소되고 많은 주민들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결국 9월 24일에는 성중에 있던 동학도들이 모두 퇴거했지만, 그러나 여당들이 여리(閭里)에 계속 출몰하고 있고 병영과 진주 관아의 관속들이 모두 도망해버려 병사와 목사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89)
  이 이후, 동학군들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서부경남 각 지역으로 흩어져 활동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조직이 어느 곳에서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쨌던 관군 및 일본군과의 본격적인 전투가 있기 전후해서 동학군은 각읍을 돌아다니면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진주 동학군이 고성·사천·곤양·단성·합천 등에서 활동하고 있었고,90) 의령 신반(新反)의 동학군들은 초계에까지 넘어가 활동을 했었던 것 같다.
  한편 조정과 감영에서는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하고 대구판관 지석영(池錫永)을 토포사(討捕使)로 내정하여, 일부 군병을 이끌고 진주·하동 등지로 가서 일본군과 협동해서 동학군을 토벌하도록 했고 통영에도 군병을 동원해서 합류하도록 했다. 일본측에서도 동학군의 하동점령 소식을 접한 때부터 이미 일본군 파견에 의한 동학군 섬멸을 논의하고 있었다.91) 일본의 입장에서는 동학도가 조선인민 중 가장 완강한 인민으로 보였기 때문에 일본의 용이한 침략을 위해서는 동학세력의 기반을 이번 기회에 부수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번 파병이 조선 각지 요소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고 생각했다.92)
  9월 25일(양 10. 23) 부산에서는 감리서 서기 2명과 서예(署隸) 15명, 막정(幕丁) 153명 및 일본군 3개 소대 150명을 파견했다. 그들은 배편으로 창원, 마산포에 도착한 후 두 길로 나누어 후지사까(藤坂) 소위가 이끄는 부대가 먼저 29일 하동으로 진출했다.93)
  그 날 하동 광평동(廣坪洞)에서 당시에 하동에 남아 있던 동학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졌고, 동학군은 섬진강 건너편으로 패주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계속해서 강건너 동학군을 추격했지만 동학군의 종적을 잃어버려 동학군이 버린 무기· 양식만 가지고 하동으로 돌아왔다. 이어 후속부대와 합류한 일군은 30일에도 섬진강 건너편에 동학군이 출몰하자 그 뒤를 추적했지만, 노획물 이외에 별 성과가 없이 하동으로 철수했다. 하동 곳곳에 수천, 수백의 동학군들이 출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94) 그 뒤 10월 7일에는 일본군 제4중대장 스스키(鈴木)대위가 서부경남 지역에 파견된 일본군을 총지휘하기 위해 곤양에 도착하면서 대구에서 파견된 관군과 일본군의 합류가 이루어졌다. 이 무렵 동학군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고 있어서 일본군· 관군과의 전투가 많이 벌어졌을 것이지만, (이 무렵 진주· 곤양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지석영은 서부경남 지역 동학조직의 핵심인물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임석준(林碩俊)이 체포되었던 것을 보고하고 있고 또 문서로 보고한 내용에는 진주· 곤양· 하동 등지에서 체포한 수많은 동학군 중 총살· 효수된 자와 방면된 자의 숫자를 나열하고 있다.)95) 서부경남 지역 동학군 주력이 크게 궤멸되었던 전투는 곤양 금오산(金鰲山) 전투와 진주의 고승산성(高僧山城) 전투였던 것 같다. 일본군은 10월 10일 곤양 안심동(현 진교면) 남쪽 금오산에 동학군 400여 명이 모였다는 사실을 알고 두 부대로 나누어 공격해서 많은 동학군을 생포하고 70여 명을 사살했다.96)


86)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南站發甲第 152號, <東學黨의 檄文通報 및 情報通知要請> pp.139∼140
87) 앞의 책 1, 南站發甲第 152號 甲午 9월 10일 忠慶大都所에서 발한 <東學徒掛榜>
88) 慶尙道觀察使 趙秉鎬의《狀啓》. (서울대 奎章閣 소장, No. 80932)
<泗川縣三公兄文狀內 今月十三日 東徒數十名 稱有査問事 捉去戶長與吏房 厥徒數百名 放砲一聲 自南門直入東軒 恐動本官 至竟破碎軍庫 掠取軍物 故本官多般曉諭 仍爲還推納庫 則厥徒濫索錢財 勒受錢標以去矣 十七日 自其接所 稱以泗川望嶺湖共知之良吏 標紙還送于官矣十八日 湖南東徒百餘名 又爲突入 留宿於作廳 十九日 轉向南海次 盡爲散去 二十日 各處東徒八百餘名 各持銃劒 期入邑邸 若見官屬 則拔劒恐偃 仍爲宿食于各公h膵?燒毁下吏黃鍾羽黃台淵家舍 如干什物 一一攫取 遍行村閭 牛馬衣服産物 惟意奪去 二十二日 轉向固城次 幷爲退去是如是白遣>
89) 앞의 《狀啓》. <十七日 東徒數千名 自河東來到本州故兵使與牧使……… 十八日 嶺湖大接主金仁培 率千餘名 入處城內吏廳 鳴己擊鼓………十九日始爲退去 中軍將二十一日率數百名 出往召村驛 網打一村………二十二日 轉向代如村龍綿洞……… 連燒三十戶……… 二十四日 城中之黨幷爲退去 然餘黨出沒閭里………>
90) 《統記》 제41책, 9월 30일. <晋州匪類 各散幾百名式 作鬧於固城泗川昆陽丹城陜川等邑 去益滋蔓 此必湖非 聞巡撫之行 稍稍流來然也>
91)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 機密第27號 <監理署에서 파견한 巡査가 東學黨을 視察한 報告> pp.71∼72
92) 앞의 책 2, <親展> pp. 92∼93
93) 《統記》 제41책, 9월 25일.
《釜山府史原稿》 6, (민족문화사 영인본) <慶尙道西南部暴徒擊攘報告> p.544
94) 앞의 책, p.544
95) 《釜山府史原稿》6, <日鮮共同으로 東學黨匪 討伐전보> 중에 첨부된 조선인 관리의 통보문 p.546
96) 《釜山府史原稿》6, pp. 544∼545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京第 96號 p.158


바. 고승산성(高僧山城) 전투

  금오산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은 무자비한 소탕계획을 세웠다. 즉 10월 12일(양 11. 9) 일본군은 진주 백곡리(栢谷里)에 동학군이 모여 진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곤양에서 진주 수곡리(水谷里)에 이르렀다. 그러나 토포사 지석영이 진주부 동20리에 있는 소촌(召村)과 동30리에 있는 집현산 아래 및 단성 북쪽 10리에 있는 정정(頂亭), 원본정(院本亭) 등의 각 지역에 동학군 4∼500명이 모여 모두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려 한다는 급보를 알려와 일본군은 즉시 길을 돌려 진주부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부대를 나누어 소촌과 집현산 부근에 이르렀으나 동학군은 이미 단성지방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군은 최후의 결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주·사천·곤양·하동·남해·단성 등지의 동학지도부는 진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총공격하기로 하고 단성으로 집결하였던 것이다.
  한편 진주에 주둔하고 있던 스스키 대위는 10월 13일자 <제3보고>에서

“ 진주부 동쪽의 소촌과 집현산하, 그리고 단성 등지에서 동학당 4∼500명이 모여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여 무기를 탈취하려고 하니 그 세가 화급”

하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동학군의 진주 공격은 서쪽과 북쪽, 그리고 동남쪽에서 동시에 협공하기로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때의 동학접주들을 《천도교 창건사》에 의하면

“ 진주의 손은석(孫殷錫)·박재화(朴在華)·김창규(金昌奎)·백주응(白周應), 곤양의 김성룡(金成龍), 하동의 여장협(余章協), 남해의 정용태(鄭容泰), 단성의 임말룡(林末龍), 사천의 윤치수(尹致洙)”

라고 하였다.

단성지방의 동학군들이 진주를 공격하려고 수곡촌(水谷村)으로 진군해 온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군은 10월 14일 진주의 서쪽 수곡촌에 이르렀다. 수곡촌 산야에 깔려 있던 동학군들의 일부는 고승산성으로 퇴거해 방어준비를 했고 일부는 북쪽으로 퇴거했다. 일본군의 공격이 있자 산성의 동학군들은 산꼭대기 누벽(壘壁)에 의지해서 완강히 저항했고, 북쪽으로 퇴각했던 동학군이 일본군의 우측을 공격해 왔다.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당황했고 부상자도 3명이나 생겼지만, 무기나 전투기술 면에서 월등한 일본군은 얼마 안가 산을 점령했다. 산꼭대기의 방어 진지가 무너지자 동학군들은 서북 덕산(德山) 방면으로 후퇴했고, 일본군 한 소대가 이를 추적했지만 미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이날 전투에서 동학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이 수거한 동학군 시체만 186구였고 부근 주민의 소문에 의하면 그 이외에 퇴주하면서 수십명의 폐사된 자가 있었다고 일본군은 파악하고 있다. 그 이외에 생포 2명, 총·칼·화약·승마·화폐·쌀 등 많은 노획물이 있었다고 한다.97)

  이와 같이 진주부근의 동학군은 일군 1개 중대의 신예무기의 위력을 당하지 못하여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곳의 대일군전투는 관군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큰 뜻이 있다 하겠다. 그것은 스스키 대위의 10월 15일자 <제5보고서>에서

“어제 14일 수곡촌으로 진격하기 전, 도포사 지석영(池錫永) 및 영장 박영진(朴英鎭) 등과 협의해서 그 병사로 하여금 한쪽을 담당케 하려했는데, 그들은 우리 군사의 일부를 갈라 그들을 따르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므로 진주에 남아서 동성(同城)을 지키라고 하였더니 기뻐하였다. 이와 같은 형편이므로 차후로는 혼자(일본군)만 각지에 이르러 일을 처리하고자 한다.”

라고 하여 일본군만이 참전했던 사실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당시에 단성현감은 이같은 동학군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등 모든 편의를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데 <관보 503년 10월 13일>자에 의하면

“경상도관찰사 조병호<趙秉鎬>는 비류(匪類)에게 음식을 제공한 단성현감 장덕근(張悳根)의 파출을 장계하니 목사(牧司)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다.”

고 한 것이 곧 그것이다. 그리고 고승산성 전투에서 전몰한 동학군은 앞서 말한 일본측 기록에는186명이라 하였고, 《천도교창건사》의 기록에는 “진주고승당산상에서 관군과 접전하다가 대패하여 여장협(余章協), 김성룡(金成龍)의 수만 도중이 전사”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한 관군은 사실과 다르며 또 ‘수만도중’이라는 숫자도 과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천도교백년약사》에서는 10월 14일 전사자로서

“사천의 수접주(首接主) 김성룡(金成龍), 대정(大正) 최기현(崔璣鉉), 중정(中正) 강오원(姜五元), 곤양의 대정 최몽원(崔蒙元),김경달(金敬達), 최성준(崔聖俊), 한명선(韓明善), 김명완(金命完), 중정 강몽생(姜蒙生), 김차계(金且桂), 조성인(趙性仁), 집강(執綱) 최학권(崔鶴權), 신관준(申寬俊), 서사(書司) 김화준(金華俊)”

등을 들고 있다. 이로 미루어 당시의 사천· 곤양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수접주 이하 대표들이 거의 다 희생되었음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편편이 확인된 바로는 사천의 신광백(申光白)과 허룡(許龍)이 전사하고, 강기우(姜基佑)는 당시 17세의 젊은 나이로 신광백(동향인)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가 부상된 몸으로 간신히 탈출하여 숨어살다가 한 맺힌 일생을 마쳤다고 유족들은 전한다. 전투의 주동자로 알려진 대접주 김성룡은 이미 전사하였음이 밝혀졌으나, 윤치수(尹致洙)에 대한 거취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곤양에서는 강재국(姜在國), 박소금(朴小金), 김학두(金學斗)가 전사했고, 김덕영(金德永)은 관헌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으며, 장학용(張鶴用)과 임재석(林在石)은 (갑오) 12월 11일 영호대접주 김인배 휘하에서 진주· 삼가출신의 동학군과 더불어 활동하다가 광양(光陽)에서 포살(砲殺)되었다. 그리고 서취익(徐就益)과 서병환(徐丙煥)은 고승산성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시체더미 속에 뭍혀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생환하여 불구로 여생을 보냈다.
  특히 곤양군의 곤명지역은 고승산성과 근접해 있던 관계로 마을마다 취반(炊飯)과 노력제공 등 동학군에 협조한 탓으로 농민들에 대한 관헌의 그칠줄 모르는 핍박은 말로서 형언키 어려웠다고 한다. 예컨대 접주 이규정(李奎井)은 곤양· 곤명· 수곡 등지에서 동학군에 적극 협력하였다가 고승산성 전투가 끝나자 은신했는데, 제보자에게 상금을 걸었으나 끝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사가(査家)인 송림리(松林里) 강씨일문(姜氏一門)에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누명을 씌워 많은 화(禍)를 입혔을 뿐 아니라, 그의 아들 기호(箕鎬)는 진주 우병영에 끌려가 모진 장독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사천·곤양지역의 동학농민군은 비록 고승산성 전투 뿐 아니라 뒤에 말하는 지리산곡에서 활동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했거나 탈출한 사람은, 좀 과장된 말이겠지만 이 고장에 전해 오는 전설에는 수백명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 사천· 곤양 등지에서는 조상의 기일(忌日)을 몰라 분묘도 없이 매년 음력 중구일(重九日)이 되면 제사를 받드는 가정이 가장 많다고 한다.
  한편, 고승산성 전투 이후 일본군과 관군의 동학군 토벌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단성· 고성 지방에서도 일부 관련 기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서부경남 곳곳에서 토벌활동이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관군과 일본군의 계속되는 토벌 활동으로 동학군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도 동학군은 지리산곡을 근거지로 해서 사천· 남해· 단성· 적량 등의 무기를 탈취하는 등, 서부경남 곳곳에 출몰하면서 활동하고 있었다.98)
  아무튼 동학도들의 활동이 점차 위축되어 가고 또 일부 읍에서는 관에서나 민포조직에 의해서 방위조직을 갖추고 동학군 진압에 나서기 시작한다. 호남과 맞닿아 있어 호남 동학군의 지속적인 공략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하동은 두 차례의 전투 후 새로 부임한 부사 홍택후(洪澤厚)가 일본군의 조언과 경상우도 각읍 군병의 지원을 받아 강을 따라 방어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고성에서도 관속과 일반 백성들을 동원하여 이들에게 무기를 주고 읍의 사문(四門)과 읍외 사방 5리를 나누어 지키는 방어체제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었다.99)
  이처럼 각읍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갈 기미를 보임에 따라 대구에서 파견된 관군과 일본군은 철수를 서두르게 된다. 관군도 오랫동안 전투와 행군에 시달리고 일본군도 인천으로 가서 양호(兩湖)의 동학군 토벌에 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석영과 일본군은 10월 24일 하동을 떠나 11월 1일(양 11. 27)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관군과 일본군의 서부경남 지역의 동학군에 대한 연합토벌 작전은 일단 마무리된다. 그 이후 동학군의 활동은 여러 자료에 단편적으로 나타나지만, 서서히 소멸되어 가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왜적토벌>과 <항일구국>이라는 우국충정의 이념은 뒤에 있은 의병운동과 3· 1운동에 이어진 구국운동이었던 것에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할 것이다.


97) 《釜山府史原稿》6, p.545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京第 98號 <晋州附近東學黨擊破詳報送付> 중 第三報告 및 第四報告, pp.204∼206
98) 《札移電存案》 第1冊, 甲午 10월 24일
晋州討捕使來電 間與日兵合勢 戰殺數百 捕梟爲二 彼徒毫不畏沼 日益猖獗 如驅飯蠅 泗川·南海·丹城·赤梁軍器 盡行奪去………
99) 《경상도고성부총쇄록》 2, 갑오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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